제갈량의충정
계간·감사 | 71
천고의 명문장으로 알려진 제갈량의 출사표다.
먼저 후주 유선에게 북벌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한실의 부흥은 선제 유비가 필생의 소명으로
추진했던 것이며 살아남은 우리가 북벌을 해서
한나라를 부흥시켜야 한다고 적고 있다.
둘째, 제갈량 자신이 전쟁터로 가서 수도를 비운
사이 후주가 곽유지, 비위, 동윤 등 관리들을 믿고
의지할 것을 당부한다. 그들은 모두 선제가 아끼던
인재였음을 덧붙이며……. 그리고 제갈량 자신과
선제 유비와의 특별한 인연을 말한다. 자기가 이
先帝創業未半而中道崩殂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然 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蓋追
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以光先帝遺德 恢弘志士之氣 不宜忘者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中略)
선제께서는 창업을 반도 못 이루고 중도에 돌아가셨습니다. 지금 천하가 셋으로 나뉘어져 있고, 익주는 피폐해져 있으니 진실로
존망의 위기상황입니다. 그러나 폐하를 모시는 신하들이 궁중에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장수들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충성
하고 있습니다. 모두 선제의 특별하신 은혜를 추억하며 폐하께 보답하려는 것입니다. 진실로 폐하께서 견문을 넓혀 선제께서 남기
신 덕망을 빛내시고 뜻 있는 인사들의 기개를 드높여야 합니다. 공연히 폐하 스스로 변변치 못하다고 여기시고 사리에 맞지 않는
비유를 들어 충간을 막아버리면 안 됩니다. (중략)
侍中侍郞郭攸之費褘董允等 此皆允實 志慮忠純 是以 先帝簡拔 以遺陛下 遇以爲宮中之事 事務大小 悉以 咨之然後施行
必能 裨補闕漏 有所廣益(中略)
시중인 곽유지와 비의, 시랑인 동윤 등은 모두 선량하고 착실하며 그 마음이 충직하고도 순정합니다. 그러므로 선제께서 선발하여
폐하께 남겨 주신 것입니다. 궁중의 크고 작은 일은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신 후에 시행하면 반드시 모자란 점을 보충 받아 널리 유
익한 점이 있을 것입니다. (중략)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亂世 不求聞達於諸候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咨臣以當世之事 由是
感激 遂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邇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謹愼 故 臨崩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夙夜憂嘆 恐託付不效 以傷先帝之明 故 五月渡瀘 深入不毛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獎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
鈍 攘除姦兇 興復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而忠陛下之職分也 (後略)
저는 본래 평범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을 갈았습니다. 난세에 목숨이나 보전할 뿐, 구차하게 제후에게로 나아가 명성이나
벼슬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제께서는 저를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송구스럽게도 몸소 누추한 움막을 세 번이나 찾아
오셔서 저에게 자문을 구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감격해서 선제께 견마지로를 다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나라가 기울어지고 장판의
패전 시에 임무를 맡았으며, 그 후 21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선제께서는 저를 신중하다 여기시고 임종하실 적에 큰일을 맡기셨
습니다. 명을 받은 이후로 그 일을 제대로 못해 선제의 밝은 덕을 손상시키지나 않을까 밤낮으로 근심하며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결과 5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쳐들어가서 남방을 평정할 수 있었습니다. 군대와 무기도 이제 풍족합니다. 마땅히 삼
군을 거느리고 북쪽의 중원을 평정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아둔하나마 힘을 다해 간흉을 물리치고 한실을 부흥하여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선제의 은혜에 보답하고 폐하께 충성을 다하는 길인 것입니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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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풍경
일을 추진하는 것은 삼고초려와 탁고를 한 선제의 은혜를 잊지 못한 때문이며
후주 유선에게 충성하는 길임을 역설하고 있다.
내용이 단순해 보인다. 이런 글이 어떻게 해서 천고의 명문장이 되었는지
의아해지기도 한다. 다시 몇 번을 읽고 음미해보니 대단히 솔직하고 사려 깊다는
생각이 든다. 북벌의 당위성, 후주 유선에 대한 당부, 그리고 유비의 은혜에 대한
보답 등 글의 목적이 분명하다. 특히 유비와의 인간적인 관계를 강조한 것은
사려 깊은 측면이다. “나는 선제가 세 번이나 찾아준 그 은혜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선제 유비가 장판파 싸움에서 패한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명을 받고
따랐다. 부귀영화나 편안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라고 밝히고 있다.
선제를 자주 언급한 것은 자칫 잘못하면 군주를 타이르거나 가르치는 입장이 되는
어려움을 피해가는 좋은 방편이며, 선제와의 특별한 인연은 다른 신하들에게도
제갈량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출사표가 후세에 계속 회자되는 것은 제갈량의 삶이 글의 내용과
일관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대의명분에 따라 공명정대했고 모자란
군주인 후주 유선에 대해 충성된 마음이 변치 않았다. 한마디로 언행이 일치했다.
특히 ‘삼고초려’는 이 출사표의 백미다.
제갈량이 먼저 유비에게 접근했다는 설도 있고 인재를 널리 구하고 간신배를
멀리하도록 후주 유선을 가르치기 위해 지어낸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래도 제갈량
본인이 직접 공식문서에서 주장한 것을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당시는 조조의
위협으로 형주가 어려움에 처한 절박한 상황이었고 유비도 어떻게 해야 할지 여러
저기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제갈량에게도 들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나관중의
소설에서처럼 두 번째까지 유비를 만나주지 않았다가 세 번째에 겨우 만나주었다는
이야기는 과장되었다고 본다.
제갈량은 산동지방에서 피난을 왔지만, 결혼을 잘해서 장모가 당시 형주의
군권을 장악한 채씨 집안 출신이었고 처이모부가 형주의 수장인 유표였다. 가문이
중시되는 시대였던 만큼, 형주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제갈량의 앞길은 탄탄대로였을
것이다.
그러나 형주는 조조의 위협으로 위기에 빠졌고, 많은 사람들이 침략자인 조조에
대해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으로 형주 사람들의 기대와
희망이 자연스레 유비에게 모아진 것 같다. 제갈량도 자신의 미래가 보장된 형주의
상실에 대해 분노했을 것이고, 유비의 인간적인 매력과 민심의 흐름에 공감하며
유비를 따라 나선 것이 삼고초려의 실상이라 생각된다.
계간·감사 | 73
제갈량, 혼란 속에서도 안정을 모색
그 후 유비는 적벽대전과 한중에서 조조에게
승리하여 한 때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릉대전에서
패하고, 그 직후 유비가 죽음에 따라 촉한은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다. 남방에선 소수민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북에서 위나라가, 동쪽에선
오나라가 압박하는 상황이었다. 관리나 일반백성
모두가 불안에 떨고 일손을 잡지 못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에서 지도층을 단합시키고 오나라와
외교관계를 회복하며 남방을 평정함으로써 안정을
가져온 이가 제갈량이다.
마오쩌뚱도 인정했듯이 제갈량은 소수민족 문제를
잘 처리했다. 7종7금의 고사에서 보듯이 인내심을
가지고 남방인들을 감화했다. 정벌후 한인 관료나
군대를 남겨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남방의 호족을
중앙관료로 등용하고, 그 젊은이들로 북벌을 위한
특공대를 구성했다. 그 결과 남방은 북벌을 위한
군대와 물자의 새로운 보급창이 되었다. 사실
유비 이후의 촉나라는 제갈량이 다시 세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겸손하게 후주 유선을 끝까지
모시는 자세를 취했다.
어찌보면 시대의 흐름을 거스른 사람이다. 도덕이
무시되고 힘이 지배하는 무도한 시대였다. 동탁,
조조, 사마의 모두 권력을 찬탈했다. 제갈량이
그들과 다른 점은 권력을 찬탈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못난
군주를 섬기며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했다.
또한 그의 정치는 엄격했지만 공정했다.
삼국지 제갈량전은 “법률 조문과 교령은 엄격하고
분명하게 했고, 상벌은 신의가 있고 공정하여 잘못은
반드시 징벌을 받았고 착한 일은 표창을 받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관리들의 간사함이 용납되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스스로 힘쓰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어, 길에 떨어져 있는 것을 줍지 않고,
강자가 약자를 침해하지 않는 숙연한 사회기풍이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후대에 들어 그를 지나치게 덧칠하고
신비화했다는 생각도 든다. 역대 왕조가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특히 나관중은 제갈공명을 마른하늘에 동남풍을
일으키고 공성계 등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는
신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베일을 벗기고 그의
진면목을 찾을 필요가 있다. 보통사람들이 모방하고
따라갈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 과거 많은 식자들이 제갈량을 비판했다.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그가 군대의 운용에는
서툴렀다는 평을 내렸다. 출사표를 쓸 당시는
위나라의 조비가 일찍 죽고 그 아들 조예가 등극하는
권력의 공백기로 북벌의 좋은 시기였다. 그러나
마속을 선봉장으로 함으로써 첫 번째 북벌에
실패했다.
출사표가 후세에 계속 회자되는 것은 제갈량의 삶이
글의 내용과 일관성을 유지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대의명분에 따라 공명정대했고
모자란 군주인 후주 유선에 대해 충성된 마음이 변치 않았다.
한마디로 언행이 일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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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청풍경
자오곡을 통해 장안쪽을 기습해야 한다는 위연의 계책을 받아들이거나 오일 등
다른 장수를 선봉으로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제갈량은 관우의
섣부른 번성공략 실패로 형주를 잃어버렸고 이후 이릉대전에서 패한 빼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심해서 전쟁을 추진했을 것이다. 모험하지 않을 사람을
택했는데 마속이 그 믿음을 저버렸다. 더욱이 “마속은 말이 실질을 넘어서니
기용해서 안 된다”고 유비가 당부한 사람이었다.
이후 다시는 북벌의 성공을 기하기 어려웠다. 위나라가 안정되어 기습하기
어려워졌고, 오랜 전쟁으로 촉나라의 역량이 피폐해 졌기 때문이다. 다만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전략에서 북벌을 계속 추진했다고 본다. 가만히 있으면 안일해져서
강력한 적 앞에서 저절로 무너질 염려가 있었다. 또한 내무에만 몰두하다 보면 후주
유선과의 알력이 커져 찬탈의 유혹에 빠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까.
한편 남송의 주희선생은 제갈량을 비정한 법가사상가라고 비판했다. 확실히
제갈량이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 측면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비 이전에 촉의
수장이던 유장은 부족한 리더십을 백성들에 영합하는 포퓰리즘으로 메운 것 같다.
사회 기강을 세울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마속을 굳이 죽이고 사후의 권력다툼을
막기 위해 유비의 양자인 유봉을 죽인 데 대한 비판도 있으나, 읍참마속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과정이었고 유봉문제는 유비의 생각이었는지 모른다.
자기 통치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후주를 잘 교육시키지 않았고 후계자를
육성하지도 못했다는 비난도 있다. 하지만 신하가 어떻게 군주를 가르치며, 후계자의
문제는 자기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자신은 군주가 아니므로…….
어쨌든 제갈량은 신도 아니었고 기적을 부리지도 않았다. 우리와 같이 평범했지만
공정한 인사, 읍참마속 등 엄정한 법집행, 주군에 대한 의리 그리고 모자란 군주에
대한 충성심 등을 통해 후세 선비들의 롤 모델이 된 사람이다. 당시는 타락한
시대였지만 백성들의 마음에 “아! 이 사람처럼 정치를 하면 분명히 좋은 세상이
제갈량은 신도 아니었고 기적을 부리지도 않았다.
우리와 같이 평범했지만 공정한 인사, 읍참마속 등 엄정한 법집행,
주군에 대한 의리 그리고 모자란 군주에 대한 충성심 등을 통해
후세 선비들의 롤 모델이 된 사람이다.
이루진 못한 꿈에 대한 백성들의 아쉬움이 사후에 그를 신의 반열로 끌어 올린 것 같다.
계간·감사 | 75
오겠구나! ” 하는 희망을 심어준 사람이었고 그의 이른 죽음에 모두들 안타까워했다.
다만 이루진 못한 꿈에 대한 백성들의 아쉬움이 사후에 그를 신의 반열로 끌어 올린
것 같다.
세 번이나 번거로이 했음은 천하를 위해서요, 두 조정을 구제함은 늙은 신하의
충절이었네, 출병하여 못 이긴 채 몸이 먼저 죽으니 길이 영웅으로 하여금 옷깃을
적시게 하네(三顧頻繁天下計, 兩朝開濟老臣心,出師未捷身先死, 長史英雄淚滿襟) 란
두보의 시구가 찡하게 울려온다.
출사표란 「군대를 일으키며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이다. 촉한(蜀漢) 제1대 황제 유비
(劉備)는 위나라의 땅을 수복하지 못하고 죽었으며, ‘반드시 북방을 수복하라’는 유언을 남겼
다. 제갈량은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군사를 끌고 위(魏)나라를 정벌하려 출병하면서(촉한(蜀
漢) 건흥(建興) 5년(227년), 떠나는 날 아침 촉한의 제2대 황제인 유선(劉禪) 앞에 나아가 바친
글이 이 출사표라고 전해진다.
출사표에는 국가의 장래를 걱정하고, 각 분야의 현명한 신하들을 추천하며, 유선에게 올리
는 간곡한 당부의 말이 담겨 있다.
이 글은 〈삼국지(三國志)·촉지(蜀志)·제갈량전(諸葛亮傳)〉에 보이는데, 편명이 없던 것을 소
통(蕭統)이 〈문선(文選)〉을 편찬하면서 붙인 것이다.
글의 구성은 전후 두 편인데 일반적으로 <전출사표(前出師表)>를 가리킨다.
한편 출사표는 진(晉)나라 이밀(李密)이 무제에게 올린 진정표(陳情表), 당(唐)나라 사상가 한
유가 쓴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과 함께 중국 3대 명문 중 하나로 손꼽히며, 예로부터 출사표
를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는 충신이 아니라 하였다.
출사표 [出師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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