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인물중에서
이미지의 차이가 가장 큰 인물은 제갈량입니다.
제갈량하면 가장 먼저 ‘공성계’가 떠오르고
공성계하면 제갈량이 군사적으로 재능이 떠오르죠.
그렇다면 제갈량의 공성계는 실제로 있었던 일일까요?
사람들은 언제부터 제갈량을 추앙하기 시작했을까요?
이중텐 교수는 제갈량의 역사이미지에 대해
어떤 독특한 견해를 지니고 있을까요?
제갈량은 이미 진때부터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진대에 곽충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제갈량을 무척이나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제갈량을 더욱 숭상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다섯가지 일’ 이라는
문장을 지었습니다.
제갈량이 한 일중에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다섯가지 일을 말하는 겁니다.
그 중 세번째가 바로 공성계입니다.
제갈량의 공성계는 곽충의 문장에서 가장 처음 나온 겁니다.
후에 배송지는 ‘삼국지’에 주석을 달 때
이 내용을 인용해 반박을 가했습니다.
당시 양평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했을 리 없다고 했죠.
당사 사마의는 형주 도독을 지내며
완성에 주둔하고 있었기에 양평 전장에 없었으니
공성계 따위 있을 수 없다고 반박한 겁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박진감 넘치기에
문학작품에 자주 출현합니다.
연극에서도 자주 볼수 있고요.
하지만 사실에 부합하지 않으며
논리에도 맞지 않습니다.
공성계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말씀드리자면
사마의가 군대를 이끌고 진격하자
제갈량은 가정을 지키라며 마속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마속은 실전에 약한 인물이었기에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결국 가정을 잃고 맙니다.
덕분에 사마의는 군대를 이끌고 성까지 쳐들어왔죠.
당시 병사가 없었던 제갈량은
성문 4개를 모두 열고는
노병들에게 성문입구를 청소하라고 시켰습니다.
제갈량 자신은 거문고를 들고 향을 피웠어요.
시동 2명을 데리고 누각에 않아 가라오케를 즐겼죠.
이 광경을 본 사마의의 군대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 했습니다.
말을 타고 달려와 본 사마의는
제갈량의 속내를 몰라 두려웠습니다.
‘성문을 활짝 열어 놓고 파티를 하다니!!’
바로 철수 합니다.
이 일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첫째, 매복이 있을까 두려워 진격하지 못한 건데
그럼 정찰병이라도 보내서
염탐할 수도 있었쟎아요.
두번쩨로
사마의는 성루까지 진군해 제갈량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모습까지 봤으니
거리가 가깝다는 소리잖아요.
바로 코앞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 화살로 쏴 죽일 수 도 있잖아요.
세번째로
곽충의 문장이나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보면
양측의 병력은 천양지차였죠.
사마의의 병사는 20만에서 십몇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어쨌든 적어도 십만이상이었쟎아요.
공격하지 않고 성을 포위만 해도 됐을 텐데
왜 철수했겠어요?
논리에 맞지 않아요. 공성계는 사실무근한 이야기입니다.
박망에 불을 놓는 이야기
신야에 불을 지른 이야기
풀배로 화살을 구한 이야기 등등은
모두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그중 가장 황당한 것은 동풍을 빌린 이야기입니다.
삼국지 연의를 한번 보십시오.
동풍을 빌릴 당시의 제갈량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도사의 옷을 입고 맨발에 머리를 풀어 헤쳤다고 했습니다.
루쉰선생은 삼국지연의가 제갈량을
지혜가 많고 요에 가까운 인물로 그려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요란 요녀가 요괴가 아니라
요인입니다.
요인이란 당시 사람들을 현혹하던
주술사나 무당 같은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제갈량은 단연히 요인이 아닙니다.
그는 요인이 아닐 뿐 아니라 훈남이었습니다.
삼국지에 따르면 그는 신장이 8척이었다고 합니다.
한대의 8척은
지금의 도량형으로 계산해보면
184c m 정도 입니다.
제갈량은 26살의 나이에 세상에 나왔죠.
26세살에 184c m 의 훤칠한 미남이었다면
어떤 이미지인지 상상이 가시죠?
우리 마음속의 이미지 혹은 무대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같은가요?
동풍을 빌린 이야기 역시 허구입니다.
설령 그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동풍을 빌린 건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였을 겁니다.
두목의 시에도 나오쟎습니까?
‘동풍이 주량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면’
‘대교와 소교는 봄날에도 동작대에 갇혀 지냈으리’
제갈량이 아니라 주유라고 표현했습니다.
제갈량이 적벽대전 기간에 세운 주요 공적은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성사시킨 것입니다.
그게 그의 주요 업적입니다.
유비가 죽기전에 제갈량이 한 중요 공헌은
유비를 위해 천하를 삼분하는 정치적 책략을 확립한 겁니다.
다시 말해 제갈량은 뛰어난 정치가였지만
뛰어난 군사 전문가는 아니었던 겁니다.
군사적 재능은 별로 없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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