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삼국지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5

첸 선생은 공성계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삼국지연의’는
줄 곧 병서로 인식돼 왔습니다.
명청시기에
청조를 세우기 전 만주족은 ‘삼국지연의’를 교재로 삼았습니다.
‘삼국지연의’를 만주어로 번역해
천 권 가량 인쇄해서 기밀문서로 삼아
높은 관직의 귀족과 관리에게 배급했습니다.
재미있는 일화도 있어요.
만주족 장군이 한족 사람을 만나 친구가 된 후 이러더랍니다.
‘자넨 좋은 사람 같으니’
‘내 방으로 가서 일급비밀인 기밀문서를 보여 주겠네’
열어 봤더니 ‘삼국지연의’였죠.
공성계의 내용에서 심리전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실 심리전이었으니까요.
모종강 부자도 ‘삼국지연의’를 평할 때 이 문제를 언급했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신중한 사람이 대담한 일을 할 수 없으며’
신중한 사람만이 대담한 일을 할 수 있다’
평소에는 무척이나 신중하던 사람이
갑자기 대범한 일을 하면 아무도 안 믿죠.
제갈량은 신중한 사람으로 평생 삼가고 조심했습니다.
신중하던 사람이 공성계를 펴자 사마의가 의심했던 겁니다.
제갈량이 신중한 걸 알았으니까요.
물론 사마의가 지식인이었기에 속은 겁니다.
문제를 복잡하게 생각했으니까요.
훗날 위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상대가 강도나 좀도둑, 혹은 산적이었다면
이것 저것 재지않고 일단 쳐들어가고 봤을 거라고요.
그러곤 제갈량을 생포했겠죠
이처럼 세 가지 이미지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전 이시간을 빌려 앞으로 여러분들에게
이러한 세 가지 이미지를 강의할 예정입니다.
그 후에 토론도 하고요
또한 세 가지에 중점을 둘 겁니다.
첫 번째는 복원입니다.
역사의 본래 모습을 복원하는 겁니다.
둘째는 비교로 역사와 문학, 민간 이미지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것이죠
세 번째는 분석으로 역사이미지가 문학과 민간이미지로 변한 이유를 분석하는 거

역사를 평가하는데는 세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옛날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으로
‘역사 견해’라고 합니다.
두 번째는 오늘날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으로
‘시대견해’라고 합니다.
세번째는 개인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는 것으로
‘개인견해’라고 합니다. – 역사를 보는 세가지 견해 역사견해, 시대견해, 개인
견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세가지 견해를 갖게 됩니다
역사는 결국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지난 날의 일이자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사실여부에 상관없이
주관적인 해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송대의 장승은 이런 사를 썼습니다.
‘수많은 육조의 흥망사가’
‘어부와 초동의 한담속에 들어 있나니’
어부와 초동의 한담속에 들어 있는 게 어디 육조의 흥망사뿐이겠습니까?
모든 역사가 들어 있습니다.
‘한 병의 탁주로 만남을 기뻐하고’
‘고금대사를 함께 담소하네’
앞으로 삼국시대에 대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으며
삼국시대를 평가할 겁니다.
가장 처음으로 논할 인물은
역사적으로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미지 또한 가장 다양한 인물입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다음 편 이야기는 ‘조조에 관한 진실과 거짓’입니다.



이중톈의 삼국지강의 2부 제3화
제갈량은 중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신화적이며 전설적인 인물이자 우상으로
중국인에게 수신, 제가, 평천하의 가장 좋은 모범으로 꼽힙니다
건안 12년
26세의 제갈량은 은거를 청산하고 세상에 나옵니다
유비가 수수께끼이듯 제갈량도 수수께끼입니다
그는 유비를 위한 준비된 인재였으며
유비의 부름을 기다린 것처럼 보입니다
수많은 영웅 중에서 제갈량은 주저 없이 유비를 택합니다
이것은 줄곧 사람들에게 의문이었습니다
제갈량은 왜 유비를 선택한 걸까요?
유비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요? 제갈량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요?
샤먼 대학교 이중톈 교수가 들려주는
제갈량 등장의 배경과 의의
이중톈의 ‘시대를 보는 혜안’편 지금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번 회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겁니다
그 많은 영웅호걸 중에서 제갈량은 왜 유비에게 꽂혔을까?
대답을 얻기 위해서는 제갈량에 대해 좀 알아봐야 합니다
특히 그의 청년시절은 어땠는지를요
진수의 ‘삼국지’를 보면
제갈량은 소년 천재였습니다
진수는 제갈량을 이렇게 묘사했죠
‘출중한 재주와 영웅의 기량을 지녔으며’
8척 장신에 용모가 뛰어나 모두가 기재라 일컬었다
제갈량은 소년 천재였고 또 미남이었습니다
184센티미터에 용모가 준수했죠 단순히 키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당시에 아주 특별하게 보였죠
그의 출신은 기록이 적습니다
고아였고 숙부 제갈현 손에 자랐다는 정도만 알려졌죠
후에 그의 숙부가 형주로 오면서 제갈량도 따라왔고
융중에서 살게 됩니다
제갈량은 융중에 온 후 ‘경독’을 합니다
경독은 농사를 지으며 공부했단 뜻입니다
제갈량은 자신의 ‘출사표’에도 이렇게 씁니다
신은 본디 필부로 남양에서 밭을 갈며
난세에 목숨을 부지할 뿐 제후에게 쓰이길 바라지 않아...
‘제후에게 쓰이길 바라지 않아...’ 이 표현은 겸손의 뜻일 겁니다
그게 싫으면 산을 왜 나왔겠습니까
하지만 ‘남양에서 밭을 갈고’ 이 부분은 사실일 겁니다
물론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농사를 생업으로 삼았다
하지만 제갈량의 출신을 볼 때 보통 농민은 아니었을 겁니다
두 번째 가능성은 취미로 농사를 했다는 겁니다
유명한 문인 혜강은 쇠를 두드렸다는 기록이 있죠
그렇다고 대장장이였을까요? 아닙니다, 그저 재미로 한 거죠
또한 제갈량은 학문에 대충이었다고 합니다
‘삼국지’엔 ‘대충 훑어봤다’라고 나와 있죠
제갈량의 벗들은 열심히 공부를 했지만
제갈량은 쑥 훑으며 건성으로 봤다고 합니다
도연명과 같은 부류입니다 학문은 즐기나 깊이 파지 않죠
사실 이건 효율이 높은 겁니다
대략만 본다는 건 요점을 읽을 줄 안단 뜻이니까요
깊이 파지 않으면서도 요점을 잡는 진정한 고수였죠
사실 저도 학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공부는 제갈량과 도연명처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글자에 매달리지 말고 핵심을 짚어내는 거죠
작은 문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천하를 논할 때 성 하나에 연연하지 않는 것처럼요
제갈량은 이렇게 대범한 사람이었죠
그 외에 제갈량에게는 두 가지 취미가 있었습니다
첫째, 무릎을 안고 휘파람 불기 둘째 ‘양보음’ 부르기
휘파람이 무엇이냐? 일종의 양생술이죠
단전에서 숨을 끌어올려 입으로... 목으로 발산하는 겁니다
그럼 양보음은 뭘까요? 이것은 장송곡의 일종입니다
아주 처량하죠
융중에 살고있는 제갈량을 상상해 봅시다
8척 장신의 20대 청년이 산속 바위에 앉아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고 산을 바라보며 휘파람을 분다
얼마나 대단한 경지입니까
아마도 그의 휘파람과 노래 속에는
인생, 사회에 대한 통찰과 연민의 감정이 담겨 있었겠죠
감회와 울분이 다 있었을 것이며...
세상사에 대한 제갈량의 깊은 통찰이 들어 있었을 겁니다
전형적인 선비이자 국사입니다
걸출한 인물이죠
국사의 특징은 무엇이냐
이전 강연에서 얘기했듯 천하 대업을 임무로 생각합니다
제갈량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상과 포부, 기개를 모두 가졌죠
제갈량은 명실상부한 국사였습니다
그는 융중에서 공부하며 벗을 사귀고 천하를 관망했는데
제갈량은 10여 년의 학습을 통해
포부가 남다르고 학문이 깊으며 식견이 깊은 인재로 거듭났습니다

 

'삼국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7  (0) 2020.12.13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6  (0) 2020.12.13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4  (0) 2020.12.11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3  (0) 2020.12.10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 2  (0) 2020.12.08